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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ㅁ집

집주인을 닮은 집

 대지는 서판교 운중천 옆에 남북으로 트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얼핏보면 벽이 집을 사방으로 감싸안은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집의 아랫 부분은 ㄱ자로 열려 외부공간과 소통한다. 이것은 외향적인 안주인과 닮아있다. 한편 집의 윗 부분은 ㅁ자 형태로 공중에 떠있는 중정이 수평 띠창을 통해 외부의 풍경을 선택적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다소 내향적인 바깥주인을 닮아있다. 아랫 마당에 심어놓은 회화나무의 가지들은 중정을 가득 채우고 봄에는 푸른 이파리로, 여름에는 하얀 꽃과 열매로, 가을에는 노란 단풍으로 중정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ㄱ자와 ㅁ자가 겹쳐져 있으되 닫힌 듯 열린 것은 겉으로 과하지 않고 담담한 이 집은 집주인을 닮았다.  

 젊은 부부와 두 자녀, 조부모 삼대가 모여 사는 가족들은 각자 다른 성향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젊은 부부는 독립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바깥 주인은 오디오 마니아이고 안주인은 조용한 곳에서 책읽기를 좋아한다. 조부모님은 주무시는 시간이 다르고 저녁 늦게 주무시는 할머니를 위한 개방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곧 사춘기를 맞이할 나이가 되어가는 큰 아이는 혼자 책읽기를 좋아한다. 반면 아직 어린 작은 아이에게 집안 곳곳은 놀이공간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아이들의 공간은 확장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게될 것이다.


두 개의 보이드

 삼대가 모여 사는 이 집에는 공간의 위계가 없다. 대신 두 개의 빈 공간이 집의 위아래와 가족 세대간을 매개한다. 하나는 집 안에 있는 가족실이고 다른 하나는 집 바깥에 있는 떠 있는 중정이다

 이 집에는 거실이 없다. 아파트 생활을 오래 한 가족들에게 큰 거실 대신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가족들만의 공간으로 쓰이도록 한 것이 가족실이다. 가족실은 많은 책을 수납할 수 있도록 한 쪽 벽을 높은 책장으로 만든 계단형 서가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넓은 계단판을 의자 삼아 혹은 책상 삼아 자세를 바꾸어 가며 공부하고 논다. 놀이 공간을 한창 좋아할 나이인 작은 아이는 이사 온 첫 날부터 계단에 배를 깔고 누워 색칠 공부에 몰두한다. 할아버지께서 이른 잠을 주무시는 동안 할머니께서는 손자들을 봐 주시고, 퇴근해 돌아오는 부부를 반긴다. 가족실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확장된 계단으로 세대의 매개공간인 셈이다.

 이 집 마당에는 담이 없다. 판교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지구단위계획을 따라 최소한의 경계만 만들고 나머지는 이웃과 나누라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웃의 집들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집 둘레에 목책을 두르고 큰 나무를 심거나 주차장에 문을 달아 담 아닌 담을 만들어 낸다. 의도가 어쨌든 최소한의 경계만 두고 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떠 있는 중정은 집의 공용 공간이 있는 1층을 열고 사적 공간들이 있는 2층을 적절히 가두어 경계를 준다. 집안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정은 다시 집의 곳곳으로 이어져 이 집을 숨쉬게 하는 빈 공간이다.


방과 방 사잇 경계의 선택

 이 집엔 문잠금쇠가 없다. 공간의 위계를 없앤 이 집의 공간들은 대각선으로 빗겨 놓인 두 개의 빈 공간을 둘러 놓여 있으되 모두 통해 있다. 1층은 세 개의 덩어리가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우선 깊이 파인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주방과 식당이 별채처럼 독립적인 공간으로 나뉘고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옆으로 가족실이 입을 벌리 듯 열린다. 다시 오른쪽으로 조부모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나온다. ㄱ자 형태지만 실은 세 개의 독립적 공간들이 ㄱ자로 집합된 것이다.

 2층의 방들은 대각선으로 빗겨 놓은 두 개의 빈 공간을 주변으로 세 개의 방을 교차로 놓되 캔틸리버 브리지로 두 개의 방을 연결해 ㅁ자 형태 동선이 순환하도록 한다. 벽 속으로 혹은 벽 위에 숨도록 만들어진 문들은 가족들의 사적 공간의 경계를 선택적으로 열고 닫히게 한다. 공간의 위계를 지우는 일, 사적 공간 사이에 경계를 선택적으로 바꾸는 일은 삼대가 모여사는 방식의 고민에서 출발한다. (다이어그램 참조)


담백한 백토벽돌집

 판교라는 동네는 생소하다. 자생적 주거지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지구단위계획만으로 주거지를 만드는 일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운중천 맞은 편 북측 경사지에 자리잡은 타운하우스는 운중천 동측 고층 아파트와 소리없이 다투며 서판교 풍경을 더욱 어수선하게 한다.

 어수선한 판교 풍경에 어수선함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백토벽돌집은 직육면체의 덩어리를 마치 땅에서 자연스레 일으킨 듯 수직 줄눈없이 수평 줄눈만 두고 벽돌들을 한 줄 한 줄 쌓아 올렸다. 수평 띠창은 주변 풍경에 맞춰 열리고 닫히고 밖을 내다보듯 긴 눈썹을 달아 창에 넉넉한 그늘막을 만든다. 운중천에 면한 ㄱ자 벽은 서서히 휘어져 그 아래 마당에 심어진 주목들 위로 캔틸리버 브리지를 경쾌하게 들어올린다.

 견고하고 단단한 외벽에 깊숙이 파놓은 개구부들을 통해 거칠거칠한 벽돌벽이 집안으로 따라 들어온다. 내부에 쓰인 자작나무 합판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수평으로 켜로 쌓아 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 보이도록 한다. 시선이 아래로 가면 켜로 보이고 위에서 보면 면으로 보인다. 좁혀졌다 넓어졌다 낮아졌다 높아지는 내부 공간처럼 재료도 거친 것과 맨질맨질한 것이 같이 쓰여도 어색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자작나무 색은 산화되어 조금 더 누렇게 될 것이고 마당에 심어놓은 회화나무 가지들은 번성하여 중정을 가득 채울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고 공간의 쓰임새도 같이 변할 것이다. 그렇게 더욱 집다워지는 것이다.


Pictureⓒ by Roh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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